심야괴담회 시즌3 87회 세 번째 괴담은 '잃은 날'입니다.
인천에 사는 이지혜(가명)씨의 외할머니인 선화(가명)씨가 겪은 사연으로, 선화 씨가 40대에 지인 미정 씨를 만나면서 생긴 일로 87회 44불의 완불을 받은 사연입니다.
잃은 날_프롤로그
1970년 당시 40살에 늦둥이를 임신한 제가 혹여라도 잘못될까 남편은 국내최고의 산부인과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날도 진료를 마치고 남편과 나오는데 복도에서 아이를 지워야 한다는 실랑이를 하는 어떤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부인에게 아이를 지우길 강요하고 있는 파렴치한 남편이 알고 보니 제 남편의 부하직원이었고, 평소에도 일 잘하고 바른 사람이라고 남편이 칭찬을 하던 직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결혼 3년 만에 얻은 귀한 아이를 하루하루 만나길 기대했지만 6개월 차가 되었을 때 뱃속의 아기가 문제가 생겨 지우지 않으면 산모까지 위험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편은 아내를 위해 아이를 포기하자고 했던 것이었죠.
며칠 후 응급상황이 생긴 미정 씨에게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미정 씨는 그렇게 아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죠.
임신한 저를 보면 마음이 아플까 봐 전 한동안 미정 씨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저는 무사히 아이를 낳고 출산 100일이 지났을 때쯤, 미정 씨의 남편이 저에게 우리 미정이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되겠냐며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렇게 전 미정 씨를 보러 미정 씨 집으로 향했습니다.
미정씨의 집
불이란 불은 다 커져있는 깜깜하고 적막한 거실 한편에 미정 씨가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미정 씨 거기 왜 그러고 있어? 괜찮아?"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미정 씨의 얼굴은 핏기하나 없는 산송장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서둘러 미정 씨를 위해 따뜻한 밥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미정 씨는 밥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제가 가져온 장바구니를 뒤지더니 과자와 우유를 정신없이 입에 밀어 넣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말이죠 하도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다 보니 미정 씨의 옷은 흘러내린 우유로 흠뻑 젖을 정도였습니다.
전 황급히 미정 씨의 옷을 갈아입히려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미정 씨.. 이거.. 왜 이래?"
미정 씨의 모유가 불어나서 안에서부터 흠뻑 젓고 있었습니다. 미정 씨는 아이를 잃은 지 벌써 7개월이 지나 모유가 나올 수 없던 상황이라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미정 씨는 자기 좀 살려달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미정씨의 이야기
아기를 보낸 후 전 하루도 제정신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출산과 버금가는 고통을 느끼며 분만실에 누워 아이를 떠나보내던 그 순간이 지금도 너무나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환청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귓가엔 분명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거든요..
한 번만 아이를 보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의사는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두었고 알아서 아이를 잘 보내드리겠다는 말을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분만실에서 들었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하루종일 제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전 아이를 위해 샀던 배냇저고리를 껴안고 맨날 맨날 울었어요. 배냇저고리를 안고 있으면 마치 아이를 안고 있는 느낌을 들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마치 아이가 있는냥 모유가 돌기 시작해 배냇저고리를 흠뻑 적실정도였고 임신한 것처럼 배가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아이의 영혼 떠나지 않고 제 품이 있는 것 같았죠
아기를 그리워하다 잠든 어느 날 전 악몽을 꾸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한기가 들어 눈을 떠보니 분만실 침대에 제가 누워 있었습니다.
제 배는 마치 만삭인 듯 커다랗게 부푼상태였고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전 사지가 뒤틀리는 고통의 시간을 보낸 후 출산을 했지만 제 품에 안긴 건 죽은 아이의 사체였습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는데 실제로 하혈을 한 것처럼 제가 흘린 피로 침대가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 아이를 떠나보냈던 병원에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복도를 서성이는데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그 소리를 쫓아 도착한 곳은 텅 빈 분만실 앞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하나가 분만실 침대에 웅크려 울고 있는 모습이 보여 얼른 안으로 들어갔는데 잠깐사이 아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황한 제가 분만실을 나가려 하는 순간.. 분만실에 있는 큰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피에 흠뻑 젖은 작은 고사리 같은 셀 수 없이 많은 아기손들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 손의 개수는 점점 늘어나 창문이 곧 창문이 깨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저는 쪼그려 앉아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착... 착..'
제 발 앞으로 작은 두 손이 다가오는 게 보였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막 태어난듯한 핏덩이의 태아가 네발로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침대 밑 선반아래.. 분만실 이곳저곳에서 핏덩이 아기들이 기어 나왔고 금세 셀 수 없이 많은 아기들이 저를 둘러쌓은 채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잃었고 남편이 분만실 앞에 쓰러져 있는 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태아령을 달래는 굿
그날 이후 자꾸 아기들의 환영이 보여 고통스러웠던 미정 씨는 결국 아는 무당에게 찾았고 무당이 말하길 억울하게 낙태를 당한 수많은 태아령이 미정 씨에게 붙어있어 굿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태아령을 달래기 위한 굿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아령의 굿은 보통굿과는 달리 상위에 아무것도 차려져 있지 않고 대신 커다란 짚인형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이 인형은 재운이라고 불리는데 미정 씨에게 붙어 있는 액운들을 이 재운이 받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태아령이 원래 한이 없는데 이상하게 태아들이 한이 많이도 너무 많아"
무당은 싸리빗자루로 미정씨 몸을 여러 번 휙휙 쓸어 넘기며 재운 쪽으로 빗질을 하며 태아령들을 재운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정성껏 주문을 외우며 재운을 불태웠습니다.
재운이 불길에 휩싸여 훨훨 타오르자 미정 씨는 갑자기 가기 싫다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전 그런 미정 씨를 붙잡고 달래며 곁에서 지켜주었습니다.
재운에게 붙은 불은 두 시간이 넘게 타다 결국 사그라들었고 미정 씨 또한 점점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태아령들의 한
미정 씨는 이후 아이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미정 씨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0년 11월 27일 전 신문을 넘기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1970년 11월 27일 자 경향신문
낙태아 콩팥등 장기까지도 수출
한 개 15불씩 매달 90개쯤
미국 플로리다연구소에 수출
기사에서는 저와 미정 씨가 다녔던 종합병원의 한 교수가 사산한 태아의 콩팥, 기관지, 소장, 대장등의 장기를 해외로 수출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미정 씨는 너무도 원통하다며 남편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사실 6개월 이상의 태아의 사체는 법적으로 인도받을 수 있어 장례라도 치를 수 있는데 아이를 더 못 잊을 거 같아 병원에서 처리하는 데로 처리해 달라고 했는데 이렇게 비인도적으로 처리가 될지 몰랐던 거죠
수백 명의 태아들..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안겨보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난 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된 태아들의 한이 너무도 깊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생에는 엄마의 품에서 세상의 빛을 보길 바랍니다.